명성산에서 궁예를 만나다

2009. 10. 21. 15:51<산행일기>/강원지역

억새밭에 숨어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겹겹이 쌓인 업장이 모두 소멸될 때까지 울었다.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성 밖에 버려졌고 애꾸가 되었다.

‘세달사’의 승려로 자랐지만

세상사에는 미련이 많았다.


산적 ‘기훤’과 ‘양길’을 만났고

지방호족 무역상의 아들 왕건을 만났다.


그리고 나라를 건국하였다.

미륵불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어 갈 무렵

업장이 심통을 부렸다.

천안통을 얻은 것이다.


사랑하는 강씨 부인이

믿고 의지하던 신하 왕건과

사통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두 아들도 왕건의 아들로 보였다


부인과 두 아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지금

왕건일파 지방호족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

.

너무 울어 배가 고팠다.

마을로 내려가

솥단지를 끌어안고 시커먼 보리밥을 정신없이 퍼먹었다.

순간 뒷머리에서 불이 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산행은 명쾌했다.

단풍은 곱고

억새꽃은 화려했다.


팔각정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솔님이 싸온 밥과 반찬을 나누어 먹었다.

꿀맛이다.

막걸리 두어 컵을 마시고 나니 졸음이 왔다.

코를 골면서 낮잠도 잤다. 행복 그 자체였다.


궁예는 이 산에서 울면서 업장을 풀었지만

나는 배불리 먹고, 마시고. 낮잠을 자면서

업장을 풀었다.


하산 길은 완만했고 부드러웠다.

주의경치에 한 눈을 팔면서

여유롭게 완보하였다.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뼈 속까지 시원하다.


지난해 여름

수락산에서 만났던 분이

수락산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10년 된 관절염도 낫는다고

너스레를 떨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


사, 오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가슴쓰린 일들이 어찌 한 두 번만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만난 회원님들은 행복해 보였다.

천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용감하게 긍정적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좋아보였다.   

...........


산은 사람들의 업장을 녹여 주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산행 경로>

산정호수 → 책 바위길 → 팔각정 → 억새군락 → 등용 폭포 → 비선폭포 주차장, 그리고 뒤풀이. 끝.


<2009.10.25(일) 해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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