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연구답사(161114)

2016. 11. 15. 00:37<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코스 : 왕궁리(왕궁터) →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수구비보) → 미륵산 미륵사지 → 홍산 동원, 객사 → 부여 왕흥사지(부산임수처)















































그리고는 함께 백제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앞으로 살아갈 계획을 세우려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백년동안 부를 이루 수 있습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것이 흙덩이 처럼 쌓여 있소" 공주는 그 말을 듣고서는 매우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이 보물을 부모님의 궁궐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았는데 마치 구릉처럼 쌓여 있으므로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있은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옮겨 줄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도착하니 미륵삼존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왕비가 왕에게 말하였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입니다." 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법상 세개와 회전, 탑, 낭무를 각각 세곳에 세우고 절이를을 미륵사라고 하였다.(삼국유사 무왕편)
























사비하가에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바위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았기 때문에 바위위에 용이 끊어 앉았던 자취가 남아 있으므로 용암이라 한다 또 고을안에는 日山 吳山 浮山 등 세개의 산이 있는데 나라가 흥왕하던 시기에 각기 신인이 있어 그 위에 살면서 날아서 서로 왕래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비하 절벽에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열 명은 앉을 정도가 되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행차하여 예불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이름을 난석이라 하였다.(삼국유사/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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