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암-화엄사-천은사 삼사순례/광속스케치(111030)

2011. 10. 30. 23:23<문화유산>/사찰순례

▲ 사성암 유리광전. 원효대사가 선정중에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사진촬영금지). 유리광전에 오르려면 속세의 마음을 버리고 천천히 오르라고 안내표지판에 쓰여있는데 속세의 마음이 없으면 오를 필요도 없는게 아닌가요?

▲ 섬진강. 섬진강의 하류부분인지 상류부분인지 더 알아봐야 겠습니다.

 

 

 

▼ 사성암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3홓로 지덩되었다. 구례읍에서 약 2km남쪽인 죽마리 오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는데 544년(성왕 22)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성암 사적>에 4명의 고승, 즉 원효, 도선국사, 진각, 의상 등 네성인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오산은 해발 530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승지이다. <봉성지>에 이르기를 "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하였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 등 12비경으로 절경이 뛰어나다. 또한 송광사 제6세인 원감국사 문집에도 오산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오산 정상에서 참선을 행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 진각 양국사가 연좌수도앴던 곳이라 하였다. 어쨌든 이와같은 기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이래 고려까지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약사전은 원효대사가 수행중에 손톱으로 그렸다는 높이 4m되는 마애여래입상이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마야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 초기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사성암의 창건 내력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 화엄사

대한 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창건에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하고 있다. 670년(신라 문무왕 10)에는 의상대사가 화엄10찰을 불법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는 중수하였다. 그리고 장육선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사지에서는 당시의 화엄사는 가램 8원 81암 규모의 대사찰로 이른바 화엄국세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라말기에는 도선국사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처 보본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승려들 또한 학살당하였다. 범종은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장육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오다가 현재는 각황전안에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1630년(인조 8)에 벽암대사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7년 만에 몇몇 건물을 건립, 폐허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뜻을 이어받아 계파는 각황전을 완공하였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 국보 제35호인 사자자삼층석답,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사자탑,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숭정9년 세사병자(1636년)  의창군 광(1598~1645, 선조의 8왕자)

화엄사 중창주 벽암 각성대사는 누명을 쓴 스승(부휴 선수)으로 인하여 1612년에 광해군으로부터 친국(鞫:왕이 직접 문초함)을 당한 바가 있었고, 의창군은

1618년에 훈작과 관직을 삭탈을 당하였으니.........두 사람의 공통점은 광해군의 정치적 피해자라는 점.그게 의창군의 글씨가 화엄사에 있는 이유일까?

<출처 화엄사 일주문 편액, 작성자 운파>

 

            心中無彩畵(심중무채화)  마음속에 그림없고                         彩畵中無心(채화중무심) 그림속에 마음이 없지만

            然不離於心(연불리어심)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有彩畵可得(유채화가득) 그림을 찾을 수도 없나니 

           <중략>

            若人欲了知(약인욕요지)   만일 누구라도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응당법계의 본성을 관찰하라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모두 다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로다

            <출처 : 행복한 화엄경 pp160-161, 정엄지음>

 

 

 

 

 

 

 

 

 

 

 

 

 

 

 

 

 

 

 

 

 

 

 

 

 

 

 

 

 

 

 

 

 

 

 

 

 

 

 

 

 

 

 

 

 

 

 

 

 

 

 

 

▼ 천은사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3년)에 덕운선사와 인도에서 온 승려 스루가 청건하였고, 경내에 시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이름을 감로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졌다고 한다. 그 뒤 875년(헌강왕 1년)에 보조선사가 이곳에 수석하면서 중축하였다. 고려 충령왕때에는 "남방제일사찰"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인 1610년(광해군 2년)에 혜정대사가 중수하고, 1679년(숙종 5년)에 단유대사가 복원하였는데, 1775년(영조 49년)에 화재롷 소실되었다. 1775년에 혜암이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불탄 뒤 중건할 때, 샘에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고 바꾸자 그 뒤로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사름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ㅐ 명필의 한 사람이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고 그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뒤로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법당인 극락보전(전남유형문화제 50)은 다포양식을 갖춘 화려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천은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보물 924)는 18세기 한국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지리산 천은사>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인 지리산은 두류산, 방장산이라고도 불렀으며 智異山이라고도 쓰고 地理山이라고도 쓰는 바 3도 6개군에 걸처있는 한국제일의 웅장한 산으로 민족의 정기가 어린 신령스런 영산이다. 옛부터 불교에서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상주 설법지라고 했고 조선 성종때의 성리학자인 김종직은 그의 유두류록에서 노고단 신주는 석가여례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고 기록했으니 불교에서 보는 지리산은 그 의미가 산 이상으로 크다. 수려한 곳에 길지를 맺어 한 가람을 이루었으니 옛이름은 감로사요 현재는 천은사라 불리운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서기828년)에 덕운 스님에 의해 개창되어 감로사라 불리웠다. 그 뒤 신라말에 도선국사와 고려 중엽 보조국사에 의해 중건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사세가 한창 번창한 고려 충렬왕(1274-1308, 8년 재위)때는 왕이 사격을 높혀서 남방제일선원이라고 하고 지리 두글자를 더하여 산을 이름한 즉 국사의 지혜가 기이한 까닭이며 뛰어난 신승들로 숲을 이루어 살았기 때문이다. 그 뒤 임진왜란의 병화로 사찰이 폐허가 된 것을 이조 광해군 2년(1774년), 수도암에 주석하던 혜암 선사가 대 화재로 전소된 전각들을 중건하였다. 천은사가 화마로 잿더미가 되자 원력을 세우고 당시 남원부사(당시 천은사는 남원부에 속해 있었음) 이경윤에게 도움을 청하고 산내 여러사찰들과 힘을 합쳐 2년여에 걸친 충장불사를 원만히 이루어 내었다. 현재의 가람 모습이 대부분 그 때 이루어진 것이다. 천은사는 역사의 짧은 부분이 공백인 상태이고 조선 후기에도 연혁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진란과 같은 병란과 몇번의 대화재로 인해 사찰연혁지들이 소멸되지 않았나 싶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태정 46년 정해년(서기 1707년)에 영남과객이라 칭한 분이 쓴 천은사 사적기가 유일하게 남아있으나 본문에서 밝혔듯 천년 고찰에 사적기가 없어 전하는 이야기를 모아 만든 사적기라 연대도 맞이 않고 고증도 어려운 실정이다. 근자에 이르러 삼성각, 종각, 천왕문을 새로 건립하고 많은 전각과 당우를  보수하고 도량을 정비하니 도량이 옛모습을 회복한 듯하다. 사찰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 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내 암자로는 삼일암, 도계암, 수도암, 우번대 등이 있다. 예전엔 약사암이라고 불리던 암자는 이후  스님들이 첨선 수행을 하는 선원(방장선원)으로 사용했으나 현재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면서 모든 참가자들에게 열려 있는 천혜의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