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연구(신도안-진산 읍치)(160501)

2016. 5. 3. 07:54<문화유산>/문화유산

고려 우왕 14년(1388년)이성계는 최영에 의해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세의 불리함을 이유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한다. 그 후 이성계는 친원세력을 축출하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친명세력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우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이성계는 끝까지 고려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 이색, 김진약, 이승인 등을 제거하고 공양왕을 폐출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개성 수창궁에서 1392년 7월 17일 왕위에 올랐다. 이로서 34대 474년간 이어지던 고려왕조는 끝나고 조선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 달 후 8월13일 태조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지만 중신들의 반대로 시기를 다소 미루게 된다. 태조의 갑작스런 천도이유와 배경을 보면 430년 간 지속되던 고려왕조의 수도 개성에서 새로운 정치를 펼치기에는 많은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전부터 전해지던 풍수도참설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즉 고려조에서는 일찍부터 도선기, 도선답산기에서 말하는 개경의 지기쇠왕설 등도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개성에 기반을 둔 기득권세력과의 갈등으로 한양으로의 천도 계획이 잠시 추춤하던 사이 계룡산 인근이 갑자기 천도 후보지로 등장하게 되는데 태조 2년 1월 왕가의 태실지를 찾던 권중화가 계룡산 일대를 도읍지로 천거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태조는 김사형, 이지란, 남은, 무학대사를 대동하여 그해 2월 계룡산을 둘러보게 되며 3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간 조감도를 만들고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기초적인 토목공사를 하는 등 실제 공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계룡산으로의 천도를 준비하던 중 경기도 관찰사 하륜은 송나라 호순신의 풍수이론 지리신법에 입각하여 계룡산 터가 도읍지로서 마땅치 않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로써 10개월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장군 심효생을 보내어 계룡산에 가서 새도읍의 공사를 그만두게 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하륜이 상언하였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인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변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데 계룡산의 땅은 산은 북서쪽에서 오고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간다하니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이 이른바 물이 장생을 파하여 쇄패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데 적당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명하여 글을 바치게 하고 판문하부사 권중화, 판삼사사 정도전, 판중추원사 남재 등으로 하여금 하륜과 더불어 참고하게 하고 또 고려 왕조의 여러산릉의 길흉을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봉상시의 제산릉형지안의 산수가 오고 간 것으로써 상고해 보니 길흉이 도두 맞았으므로 이에 심효생에게 명하여 새도읍의 공사를 그만두게 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호씨의 글이 이로부터 비로소 반행하게 되었다. 임금이 명하여 고려왕조의 서운관에 저장된 비록문서를 모두 하륜에게 주어서 고열하게 하고는 천도할 땅을 다시 보아서 아뢰게 하였다. 왕조실록의 기록처럼 하륜은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투여된 신도안의 땅을 수파장생의 불리한 터라는 풍수구절 한마디로 천도를 무산시켯는데 풍수의 말한마디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손실과 혼란에 대해 다른 대신들은 별 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성계의 급격한 개혁에 대해 하륜의 계룡산 천도 반대의견에 동조함으로서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지종학, "하륜의 풍수와 신도안 입지의 비판적 검토". 「한국민속문화」53.2014.11, 181∼204) 





























풍수는 조선시대 읍치의 주요 기능적 건축물과 장소의 입지와 배치 결정 및 이동에도 일정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대표적인 읍치 건축물이라고 할 만한 객사,동헌(아사), 향교는 가급적 풍수가 좋은 위치에 입지하는 경향성을 나타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 건축물의 이전 동기에도 풍수가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다수있다. 물론 객사, 동헌, 향교와 그 밖의 제의시설 등은 각각 기능과 위계가 달라서 건물의 입지 및 배치에 상대적으로 다른 개성을 나타낸다. 먼저 客舍와 衙舍의 기능성과 위계성이 어떻게 풍수
와 연관되어 공간적 배치에 반영되어 읍치경관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경상도 읍치의 실제 사례를 들어서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衙舍는 客舍에 비해 실질적인 통치의 기능성이 강조되고, 客舍는 衙舍에 대하여 형식적인 질서의 위계성이 강조되어 읍치공간에 표현된다. 客舍와 衙舍의 절대적 위치를 고찰하여 보면, 客舍는 읍치공간에서 국가적 지배질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경관 지점에 위치하는데, 그곳은 실제적으로 읍치공간의 중심이나 상단부 혹은 배후, 그리고 읍치공간의 주축선인 南門大路의 頂點에 위치하였다. 한편 東軒(아사)은 客舍보다 次下位의 위계를 지니는 건축물이지만 지방 통치권력으로서의 중심성이 실질적으로 드러나는 경관 지점이 선택된다. 특히 지방 관아는 私的空間인 內衙를 갖추기 때문에 常住기능을 감안하여 비교적 客舍보다는 주거환경에 비중을 두기 마련이며 따라서 客舍보다 풍수적 입지성이 더 짙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客舍와 東軒건축물의 主向을 비교해 보아도 客舍는 기본향으로 南向하는 궁실건축의 절대적 정형성을 고집하고 있는 반면, 東軒은 기본향 외에도 풍수적 地勢向을 선택하고 있는 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최원석, 2005, 14-15).풍수는 읍치 주요 건축물의 이전 과정에도 요인이 되었다. 군위 읍치는 풍수적인 이유로 동헌을 옮긴 적이 있는데, 현감 남태보가 지은 <衙舍重建記>에 의하면, 衙舍자리가 풍수에 좋지 않아 옮겼다는 내용이 현전한 다. 특히 향교의 입지 및 이동에 풍수는 비중 있게 영향
을 끼쳤다. 조선 중기 이후에 鄕儒들이 향교의 移建을 요청하여 실제 옮긴 사례가 많았던 것 역시 풍수지리적 영향이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이정국 외, 1990, 31).
그밖에도 조선시대 읍치의 중요한 제례시설로 1廟(文廟)·1社(社稷壇)·2壇(城隍壇, 견壇)이 일률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형식적인 배치 원리를 따르지만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지방의 특성에 맞추어 장소 선택이 유연해지고 그 과정에서 풍수도 영향을 끼쳐 입지 선택에 개입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대한지리학회지 제42권 제4호, 2007.12, 540-559 (20 pages) 조선시대 지방도시의 풍수적 입지분석과 경관유형- 경상도 71개 읍치를 대상으로- 최원석


진산면은 서쪽으로는 산 높이 878m의 주봉을 이루는 대둔산 아래 인대산, 간란봉, 국사봉 등 산 높이가 500m가 넘는 산을 끼고 그 아래 여러 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유등천, 묵산천, 삼가천, 읍내천, 만악천 등이 펼치는 분지지역에 위치한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로 추산을 하며 청동기시대에는 이미 취락이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백제시대에는 진기하고 수려한 사노가 계곡에 마을이 있다 하여 진동현이 설치되고 그 고을에 속했던 지역이다. 백제와 신라가 잦은 싸움을 할 때에 백제의 외곽지대로 백제 동부사령에 속했던 백제 오방득안성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광복군이 탄현과 황산벌 사이를 점령하고 준동하여 서라벌과 사비성과의 교통망이 단절되므로 새로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에서 금산을 지나 누루기재로 통하는 길이 번잡해질 때에는 사람들이 고을과 마을을 비워 백제의 뿌리 깊은 국가관념이 집요한 지역으로 통했던 지역임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다. 신라 때는 황산군에 속한 영현이었으며 고려 때는 진례군에 속한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말기 공양왕 2년부터는 전라도 고산현감이 겸해서 다스리는 지역이었다. 1963년 전북에서 충남으로 환원되었다.(진산면사무소 홈페이지, 진산면 소개, 유래 및 연혁) 진산초등학교는 1912년 5월 1일 진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 하였다(진산초등학교 홈페이지). 조선교육령(1911년)에 의해 성재산 아래에 있던 객사를 허물고 그 터위에 학교를 짓고 개교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진산군 읍치의 진산(주산)은 대둔산으로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해동지지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