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청량사, 희방사, 부석사)(100822)

2010. 8. 27. 01:23<문화유산>/사찰순례

 청량사는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다. 청량사 홈페이지의 청량사 소개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대하고, 빽빽한 기암괴석으로  열두 봉우리가 나그네의 눈길을 잡는다. 기슭 한 가운데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 자리에 자리 잡은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6)에 의해 중창된 천년 고찰이다. 창건당시 승당등 33개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 에서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메웠다고 한다. 또한 자연경관이 수려한 청량산에는 한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 (望仙菴)등 대소 27개소의 암 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있다. 청량사의 법당인 유리보전은 창건연대가 오래되고 짜임새 있는 건축물로 인하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입산수도 한곳이라 의상봉이라 불리며, 이곳을 비롯해 보살봉, 연화봉, 축융봉 등 12개의 암봉이 있고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등 12개의 대와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가 있다. 청량사에는 불교의 우수한 유적 건물이 많았으나 어느 때인가 소실 등으로 인하여 거의 없어지고 현재 신라시대 대찰의 모습은 없지만 망월암 등 33개 암자가 있었던 유지가 있고,문수보살, 지장보살, 16나한등이 봉안되어 중생의 근기에 맞는 기도처로서 손색없는 도량의 모습을 띄고 있다.

 

청량산은 퇴계 이황과 인연이 많다. 청량산 자락(현재의 '청량정사', 또는 '吾山堂' 자리)에 집을 짓고 공부한 인연으로 청량산의 매력에 흡뻑 빠진 퇴계이황은 임금님께 간청하여 청량산을 하사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연대사를 중심으로 3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불교 중흥지는 퇴계 이황을 따르던 수많은 유생들의 놀이터로 변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 

※ 퇴계 이황(1501-1570) : 조선조 명종/선조 시대 명신, 학자, 남인 계열의 종주, 자 : 景浩, 호 : 退溪(退居溪上), 본관 : 眞寶, 시호 : 文純, 도산서원건립(1555년), 주요 저서 : '사단칠정분리기서', '주자서 절요', '성학십도', 현재 : 천원권 지폐 모델로 활동 중임.

 

                청량산가

                                   - 퇴계 이황-

 

청량산 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믿을 손 桃花로다

桃花야 떠나지 마라 魚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 12봉을 아는 이는 나와 갈매기 뿐이로다. 갈매기가 떠들겠는가 못 믿을 건 도화(복숭아 꽃)로다. 도화(복숭아 꽃)야 떨어지지 마라 어부마저 알까 두렵다)

 

 

 

 

 

 

 

 

 

 

 

 

 

 

 

 

 

 

 

 

 

 

 

 

 

 

 

 

희방사

희방사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있는 사찰로 희방사 역에서 동북쪽으로 4km 정도 되는 소백산 기슭 해발 850m에 사찰입니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두운대사가 세운 것으로 전합니다. 중앙선 희방사역에서 동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소백산 기슭에 자리한 희방폭포는 소백산맥의 연화봉(1,383m)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데, 높이 28m로 내륙지방에서 가장 큰 폭포입니다. 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엔 숲과 그늘과 바위덩어리가 펼쳐져 있으며 폭포 바로 위에는 희방사가 있습니다.

 

희방사 건립에 관한 이야기

지금부터 1,300년 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두운대사(杜雲大師)는 태백산 신원암이란 암자에서 수도를 하다가 지금 희방사가 있는 소백산으로 자리를 옮겨 초막을 짓고 수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몹시 치는 어느 겨울날, 오직 수도에 여념이 없는 대사 앞에 암범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는 눈치를 보였으므로 대사가 자세히 살펴보니 산기(産氣)가 임박해 있으므로 부엌에 검불을 깔아 새끼를 낳게 해 주었습니다. 범은 새끼를 두 마리를 낳았고, 대사는 어린애처럼 거두어 주었습니다. 눈이 녹기 시작하는 초봄이 되자 범은 새끼를 데리고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저녁 문밖에 기척이 있어 내다보니 그 범이 와서 얼굴을 찡그리고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무엇을 호소하는 듯하였습니다. 대사는 반가이 맞이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서 입을 벌려 보아라." 하면서 입안을 살펴보니 목구멍에 커다란 은비녀가 걸려있지 않는가? 이것을 본 대사는 크게 꾸짖고 타이르니 범은 사과하듯 사라졌습니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달 밝은 깊은 밤에 범이 또 찾아와서 문을 흔들었습니다. 대사가 문을 열자 장삼을 물고 당기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앞산 큰 바위 밑에 혼수상태에 빠진 한 처녀가 누워 있지 않는가! 대사는 급히 그 처녀를 초막으로 옮기고 물을 끓여 먹이며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습니다. 처녀는 경주 계림에 사는 호장(戶長) 유석(兪碩)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이 살아 돌아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호장은 대사의 수도생활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큰 절을 지어 주기로 결심하고 "이곳은 신라의 훌륭한 문화의 자취와 고적이 많으니 한 3개월 동안 조용히 순례하면서 유해 주시오."하며 간청을 하자 대사도 순순히 응했습니다. 3 개월이 지난 어느 화창한 봄날에 호장과 대사는 나귀를 타고 풍기 소백산으로 향했습니다. 아! 그런데 어이된 일인가? 연화봉으로 가는 길은 큰 길로 닦아져 있고, 동구 밖 여울에는 쇠다리까지 놓여 있으며 초막은 없어지고 큰 법당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호장이 대사를 위해 선물을 내린 것입니다. 절 이름은 전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희방사(喜方寺). 아래 다리는 수철교(水鐵橋). 풍기 서문 밖에 놓은 다리는 유다리입니다. 유 호장은 대사와의 인연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도솔봉 아래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유석사(兪碩寺)라고 하고, 백여 두락을 사서 공양미를 드리게 했다고 합니다. “두운대사와 희방사에 얽힌 이야기”(박장영) 인용

 

 

 

 

 

 

 

 

 

 

 

 

 

 

부석사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한다. 〈송고승전 宋高僧傳〉 의상전(義湘傳)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鄕音)으로 보기도 한다.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상 이후 혜철(惠哲)을 비롯하여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無染)과 징효(澄曉)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이곳에 머문 원융(圓融)은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전하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72년(공민왕 21) 원응(圓應)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하여 원각전·응진전·안양루·선묘각·범종루·자인당 등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고려판각(보물 제735호)·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있는 석룡(石龍)·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 등이 전해지고 있다.

 

부석사에 깃든 전설

부석사에는 의상대사와 당나라 처녀 선묘간의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의상은 699년 불법을 닦으러 중국에 도착해 어느 불교신도 집 에서 묵었는데 선묘는 그 집의 딸이었다. 사랑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의상이 불법 정진을 위해 선묘를 멀리하면서 헤어지게 됐다.

의상을 흠모하던 처녀는 의상이 공부를 마치고 10년 후 신라로 건너 갈 때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려 했으나 배가 이미 떠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상이 떠나자 처녀는 자신이 용이 되어 의상의 귀향길을 돕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다른 종파의 반발로 부석사를 못 짓자 커다란 바위로 변해 이들을 위협해 내 쫓음으로써 의상이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부석사의 부석(浮石)은 바위로 변한 선묘가 땅 위에 내려앉았다는 데서 연유했고, 무량수전 왼쪽의 커다란 바위가 바로 선묘가 변한 바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