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산수업(151122)

2015. 11. 22. 21:52<문화유산>/문화유산

 

 

 

백사 이항복 선생과 후손 경주 이씨 문중 묘역(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2)

 

백사 이항복은 경주이씨 상서공파 9세손으로서 아버지 몽형의 나이 57세에 출생하였고 아명을 만득이라 하였으며 만득이는 9세에 부친을 여의고 16세에 모친상을 당한 4형제중 막내로서 19세에 권율 장군의 따님과 혼인 후 32세 때 14세된 나주 오씨 부인을 또 맞이하였다. 鰲城府院君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중에 병조판서를 5번이나 역임하며 국난수습에 매진하였으며 이조판서와 양관(홍문관, 예문관)대제학을 겸직하였다. 43세에 좌의정을 역임하고 영의정으로서 국사를 돌보던 중 광해군 10년 62세 대 중풍으로 와병중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63세에 별세하였으나 후일 복관되어 청백리에 錄選되었다. 백사 선생 묘소의 안산을 관찰(예산 모습 연상)하면 점혈 이유가 판단된다. 공의 묘소는 스스로 선정한 것이라 하는데 공의 후손에서 정승 6명, 대제학 2명이 배출되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제 이시영과 이종찬 전 국회의원, 이종걸 현 국회의원도 공의 후손이다. 포천 입향조는 백사의 조부 찬성공 이예신인데 공 또한 자신의 신후지지를 자점하면서 "내가 매당된 후 반드시 큰 인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는 설이 있다. 백사의 후손중에 첫째 부인 안동 권씨 소생보다는 둘째 부인 나주 오씨 소생들이 더 출세를 하였는데 그 연유를 백사 묘소 좌하단의 나주 오씨 부인 묘소를 관찰하기를 권한다.

 

 

 

 

 

 

 

 

 

 

 

전계 대원군(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부친) 모역(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11-13)

 

 전계 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아들로서 홍국영 역모 사건에 무고로 강화도로 추방되어 가난한 농부로 불우한 일생을 살았다. 조선 24대 임금 헌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순조비 순원왕후가 전계군의 3남 이원범(강화도령)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여 철종이 즉위하였으며 전계군은 왕의 생부로서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전계대원군의 묘소는 당초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현 서울 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은언군의 묘 아래인 해좌원에 예장하였다가 다시 강화군으로 이장되었으며 이후 또 다시 여주로 이장되었다. 철종 즉위 후에 다시 1856년(철종 7년) 경기도 포천시 포천읍 선단리 산 11번지 해룡산 임좌에 이장하였다.  전계 대원군의 현 묘소는 철종재위 시에 세도정치를 휘두르던 안동 김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이장을 하였는데  철종이 권위가 높아지는 것을 염려하여 직전의 묘소보다 격이 한참 떨어지고 풍수지리상 흉지에 가까운 곳을 점지하였다는 설도 있는데 내룡(입수룡)과 안산을 세밀히 관찰하기를 바란다.

 

 

 

 

 

 

 

 

 

<보성 오씨 포천 한림공파 추모공원>

 

 

 

 

 

 

 

 

白江 李敬輿 묘역(조선 4대 명별 문중 3대 대제항 배출)(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26-2(약천사 뒤 캠프산장 뒷산)

 

영의정 백강 이경여는 세종대왕의 13번째 아들 밀성군의 6대손으로 25세에 문과급제후 광해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낙항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재 등용되어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구금되었다가 소현세자를 배행하여 귀국하였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여 영의정에 등용되었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명예직인 영중추부로 전임되었다가 73세에 별세하였다. 조선 중기 4대 명벌(백강 이경여 선생의 전주 이씨, 월사 이정구 선생의 연안이씨, 사계 김장생 선생의 광산 김씨, 약봉(藥峯) 서성(徐渻)의 대구 서씨 문중)로 꼽히는 백강선생의 문중 후손중에서 3대 연속 대제학과 좌의정 3명 우의정 2명이 배출되었는데 그 연원은 포천 제일명당이라는 백강 이경여 선생과 장남 이민장공의 매화낙지혈 덕이라 한다. 이 묘역은 용혈사수 혈증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반드시 래용맥을 밟으면서 암석으로 된 입수도두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