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산책(101128)

2010. 11. 29. 01:10<문화유산>/문화유산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어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덕궁가는 길을 확인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있다. 대부분 일본사람들이다. 1910년 흥복헌에서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설마 그런연유로 일본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은 아니겠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까닭에 많이 찾아오겠지.. 하면서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해 본다. 인정전 마루는 일본식 문양으로 깔려있다. 인정각은 대한제국의 정각이니 다른 전각과는 다르게 황제의 색인 황색으로 문틀이 칠해져 있다. 문화재를 볼 때에는 색깔하나도 허투로 볼수 없는 것이다. 창덕궁에는 유리문, 욕조, 침대 등 근대 문물들이 곳곳에 침투해 있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지켜본 궁궐인 창덕궁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중전인 순정효왕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과 부인 이방자여사가 생활하다가 생을 마감한 곳인 만큼 지금도 궁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망가지지 않은 것 같다. 어디선가 황제께서 신하들을 대동하고 행차하실 것만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 인정전(국보 제225호). 태종5년(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광해군 2년(1610년)에 중건했고, 1803년(순조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닥은 쪽마루이나 원래는 전을 깔아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며, 순종 때 서양식 건축의 실내양식이 들어오면서 서양식의 커튼박스·전등시설·전등갓 등으로 장식되었다. 평면의 중앙 어칸 뒤쪽에는 어좌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 일월오악병풍이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특히 중앙에 보개천장을 만들고 봉황새 1쌍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합각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 추녀마루 위에는 잡상을 늘어놓아 장식했다. 특히 용마루에 5개의 이화무늬장[李花紋章]의 장식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일제가 설치한 것이다. 인정전과 인정문 사이의 공간에는 중앙이 높고 양쪽이 낮은 어도가 있고, 그 좌우에 18품의 품계석이 있으며 조정에는 넓고 얇은 돌(박석)을 깔아 마무리했다. 문틀은 황제의 색깔인 황색으로 칠해져 있다.

▲ 돈화문.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궁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세운 문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사용되었고 신하들은 서편에 있는 금호문을 이용하였다.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서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왕조 제1의 정궁으로 역할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미롯한 동양의 궁궐 예제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염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구성은 경희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에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 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 부터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 동궐의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금천교가 보이고 진선문이 보인다. 아직 남아 있는 가을의 흔적....

▲ 진선문. 진선문에는 태종대와 영조대에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와서 치면 왕이 직접 해결해준다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진선문 현판 글씨는 1999년 복원 당시 서예가 정도준씨가 썼다.

▲ 진선문에 들어서면 넓직한 어도가 나온다. 중앙의 불룩한 부분이 임금님께서 다니시던 길. 우측은 문관, 좌측길을 무관이 다녔다.

▲ 인정문.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은 조선 영조 20년(1744) 불탄 것을 이듬해 복구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창덕궁의 정전. 조례 등 공식적인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인정전 앞뜰 조정에는 박석과 품계석이 있다. 박석을 매끄럽지 않게 다듬은 것은 햇빛이 반사되는 것을 막고  돼지가죽으로 만든 가죽신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함.

 

 

▲ 인정정 우측 모습

▲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인 선정문. 선정전은 임금과 정 3품 당상관 이상의 신하가 매일 정치를 의논하던 곳이다. 선정전은 인정전의 동쪽에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단층 팔작집이고 지붕에 청기와를 얹었다. 선정문에서 복도로 이어졌다. 선정문은 솟을 대문의 형태를 띄었다. 선정전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고 관리들이 두줄로 앉아 정사를 논의했다.

▲ 희정당 일원.

▲ 희정당.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었다. 이는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 희정당 일원

▲ 희정당 건물

▲ 희정당 내부 모습

▲ 대조전으로 들어가는 문 선평문

▲ 대조전. 보물 제816호.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반정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에 다시 지었고, 1833년에 또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191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자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수천 칸 전각들을 헐어낸 재목으로 대조전과 그 일곽을 복원했다. 중앙에 높은 돌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솟을대문이 있고, 그 좌우로 행각을 둘러 대조전 몸체를 'ㅁ'자형으로 감싸고 있다. 대조전은 대문과 마주하는 곳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월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월대와 대문 사이에는 어도가 있고 월대 네 귀에는 드무(무쇠로 만든 솥)가 있는데 물을 담아 방화용수로 사용했다. 현재 대청은 쪽마루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를 가설하지 않아 내전임을 나타냈다.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한 다음 용두와 잡상으로 장식했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행각을 두어 경훈각(景薰閣)과 연결했으며, 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석단들을 두고 그 위쪽으로 담장을 쌓아 아름다운 후정을 조성했다. 특히 검은색 벽돌과 붉은색 벽돌로 무늬를 놓은 굴뚝이 석단 위에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 순정효황후가 사용한 침대

 

 

▲ 임금님을 배알하기 전 대기 장소. 현재는 전통차를 파는 찻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 동궁전(?), 성정각(?)

▲ 동궁전(?)

▲ 약방. 간판의 글씨 크기가 다르다. 임금님을 뜻하는 글자는 크게 섰다.

▲ 비원가는 길

 

 

▲ 장낙문. 낙선재 정문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년) 23)의 글씨이다한나라 때는 천자의 모친을 장락궁(長樂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낙선재.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통틀어 낙선재라고 한다.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년)도 낙선재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 후 이은의 부인 이방자(李芳子,1901~1989년) 여사가 여기에서 살았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때 문인인 섭지선(葉志詵, 1779~1863년) 2)의 글씨이다.

 

▲ 낙선재 일원

▲ 낙선재

▲ 석복헌. 석복헌은  헌종이 아끼던 경빈 김씨의 처소 입니다. 첫번째 왕후인 효현왕후께서 슬하에 자식도 없이 16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뜨자 서둘러 두번째 계비를 맞이 하게 되는데 헌종이 점찍은 경빈 김씨는 간택되지 못하고 이 삼간택에서  떨어져 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합니다.  헌종은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여 결국 후궁에 봉하고, 경빈에 책봉합니다. 궁호는 순화궁이라 합니다. 또한 순종황제의 두번째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까지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입니다.

 

▲ 수강재. 수강재는 헌종당시 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처소 입니다

 

▲ 숙장문. 왼편에 인정문이 있다.

▲ 금천교. 창덕궁 금천교(錦川橋)는 태종 11년(1411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금천교(禁川橋)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금천(禁川)은 풍수적인 의미로 궁궐의 배산임수를 이루며, 주술적으로는 나쁜 기운이 이 물을 건너지 못하게 하여 창덕궁을 보호한다는 바람이 담겨있다. 금천교(錦川橋)의 네 모서리에 산예(山猊)라 하여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들이 조각된 것도 금천(禁川)의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 궐내각사

▲ 궐내각사 안내도

▲ 내각.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이다. ‘내각(內閣)’이라는 현판은 규장각 남문에 붙어 있는데 이는 최근에 규장각을 복원하고서 붙인 것이다. ‘내각(內閣)’은 ‘궁궐 내의 중앙 관서’라는 뜻이다. 2001년에 설치하면서 서예가 이동익(李東益)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 규장각.  내각이라고도 하며 왕실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 곧 창덕궁의 북원(北苑), 곧 지금의 주합루(宙合樓) 자리에 새로 집을 짓고 규장각 이라했다. 지금의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 검서청.

옥당. 홍문관의 별칭이다. 1894(고종 31)년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쳤다. 건물은 일제에의해 헐렸다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 약방. 내의원. 현판은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양지당. 임금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모시기 전에 머물며 재계하던 집이다.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했다. 임금의 초상화나 임금이 쓴 글씨를 궤에 담아 보관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없어졌으나 최근에 복원하였다.‘양지(養志)’는 ‘고상한 뜻을 기른다’는 의미와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이동익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 내각일원

▲ 선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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